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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2)

by White._.Fox 2023. 1. 18.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그는 1886년에 마르타 베르나이스(Martha Bernays)와 결혼했다. 마르타 베르나이스는 날씬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독서를 좋아하는 총명한 여성이었다. 또한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이자 독일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먼 친척인 이작 베르나이스(Isaac Bernays)의 손녀로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녀의 삼촌이자 이작 베르나이스의 아들인 마이클 베르나이스(Michael Bernays)는 어린 나이에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뮌헨 대학의 독일어 교수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1882년 4월에 만나 4년간의 약혼 후 1886년 9월 14일에 함부르크에서 결혼했다. 약혼 기간 동안 서로에게 보낸 프로이트와 베르나이스의 연애편지를 모두 읽은 프로이트의 공식 전기 작가 Ernest Jones는 그들의 편지가 "세계의 위대한 사랑 문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프로이트가 베르나이스에게 보낸 900통의 장문 편지들을 보면, "나는 일종의 열정적인 매혹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언들이 담겨 사랑이라는 격렬한 관계의 흥망성쇠를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마르타 베르나이스는 프로이트와 결혼을 했으며, 그들은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후 1891년 프로이트는 그의 최초 저서인 '실어증 이해를 위하여'를 냈으나 그의 저서는 사람들의 혹평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나이가 40대가 들어서면서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 수많은 심신증 장애에 시달렸고, 이 시기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과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 발달의 변천에 대하여 탐색하는데 몰두하였다. 1895년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같이 '히스테리 연구'를 펴냈다. 그 시기에도 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분석하면서 1896년에 죽은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에게 적대감을 느꼈고, 어린 시절 자신에게 따뜻하고 매력적이었던 그리고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꼈던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던 프로이트는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한데 모아 1988년 11월, 빈에서 라이프치히와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면서 빈 정신 분석 학회를 만들었으며, 1901년 '일상생활의 병태 심리'를 발표해 우발적 행위에 대한 의미를 명백히 밝혔다. 프로이트의 책들이 1900년과 1902년에 출간된 이후로 프로이트 이론에 관한 관심이 점점 증가하였으며,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비평하는 지지자들과 부딪히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했던 카를 융이었다. 두 사람이 갈라지게 된 이유는 카를 융이 신비주의와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다룬 탓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카를 융이 관심 갖던 신비주의와 종교를 비과학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프로이트의 생애를 살펴보면 1905년,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 '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집필, 1908년 4월에 잘츠부르크에서 국제 정신분석학 대회 제1회를 개최, 1909년 9월에는 클라크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연, 1910년에 국제 정신분석 학회가 정식으로 발족, 1912년에는 '이마고(Imago)를 창간해 '토템과 터부'를 연재하였다. 또한 1914년이 되자 '정신분석 운동사' 및 '미켈란젤로의 모세'를 출간하고, 1915년 빈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를 시작했으며, 1917년 '정신분석학 입문'을 출간하였다. 이렇듯 프로이트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정신분석과 관련하여 많은 책을 출간하고, 강연을 다녔다. 그러나 1922년 4월 구개암 판정으로 수술받게 된 프로이트는 죽을 때까지 32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병행하며 연구에 힘을 썼다. 1923년 4월, 프로이트는 '자아의 원초아'를 저술하여 자아와 원초아의 개념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1930년, 프로이트는 심리학과 독일어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괴테 문학상을 받았다.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였으며, 그들이 불태운 책 중에서도 프로이트의 책들이 특히 두드러졌다. 나치 독일이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빈에서 반유대주의 감정이 차올랐고, 비밀경찰들이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들의 집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또 빈 정신 분석 학회가 해산당하고, 프로이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재산과 책을 모두 뺏자, 프로이트는 "자유로운 죽음을 위하여" 망명길에 오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그는 1938년 6월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가족과 함께 빈을 떠나 런던 햄프스티드의 20 Maresfield Gardens(현재의 프로이트 뮤지엄)로 망명하였다. 피츠존 거리(Fitzjohn's Avenue)와 벨사이즈 길(Belsize Lane)에는 프로이트의 동상이 서 있다. 프로이트는 지독할 정도로 담배를 즐겨 피우는 애연가였으며, 시간 약속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1939년 9월에 친구이자 의사였던 막스 슈어를 설득하여 자살을 돕도록 하고는, 프로이트는 미완성 원고인 '정신 분석학 개론'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두고 1939년 9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죽은 지 사흘 뒤에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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